<Household> (2024)

 

 

<Household>

2024. 11. 9. (sat) 13:00

서울 마포음악창작소

 

기획/작곡. 이은화

글. 최세리

사운드디자인. 이관규

기술지원. 나지수

무대감독. 박한서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인가구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소리를 채집하고 그 소리에 음과 리듬을 섞어 음악을 만들었다. 사전에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통해 총 4개의 테마를 정했고 각 테마 별로 음악의 토대가 된 짧은 글을 썼다. 이 공연은 쇼케이스 형식으로, 약 30분 동안 4개의 음악을 연주하고 텍스트를 함께 선보인다. 

 

part 1. Door

 



마음이 자꾸 밖을 떠돈다고 믿을 때

밖에서 찾아오는 것들이 세계에 침투할 때
계속해서 들어오려는 것들은 언제나 저 너머의 세계이고
내가 누워있는 벽 안에서도 생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지.
문을 닫으면 이 세계와 저 세계는 이제 서로 다른 것이 되고
바닥은 어디에서 벽이 되는 건지.
언젠가 이 여섯 개의 벽이 둥글게 돌아가며 지구와 함께 자전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는데.
문을 닫으면 벽 안에서 떠도는 소리들
진동하는 것들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오는 숨소리
‘지구가 돌고있다는데요, 우리도 함께 여기에서 돌아가고 있다는데요.’
어쩔 때는 너무 어지러워서 벽 사이에 끼어 고정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는데,
문 밖의 일기와 벽 안의 일기는 너무 달라서
당신은 가끔 당신의 일기를 대신 쓰기도 한다.저 밖에서 이어지는 생에 대해서,
그런 시간들은 모두 아무도 모르게 지나가기를 빌면서.
천장을 보고 누워 갈비뼈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을 때, 
당신은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듣기도 한다.
바닥과 천장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소리를,
문 밖에서 어떤 세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문 너머로 확장되는 세계의 이야기를.

 

 

Part 2.



어느 날에 물이 흐르는 소리는 아주 일상적이었는데, 사람이 사는 집에서 물이 흐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윗집에서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하루가 시작되고 누군가는 출근을 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방이 방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러니까 이 집이 이 건물 안에 있는 하나의 텅 빈 공간인 것처럼. 그러니까 그게 아닌 건 아닌데 집이라는 건, 방이라는 건 그렇게 공허처럼 느껴지는 일은 잘 없으니까. 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제습기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고, 어딘가에서 증발되고 있을 습기들이 다시 물이 되는 소리. 그런 걸 들으면서 이 방 안에서 다시 이뤄지고 있을 생명의 순환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이 방이 개별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 있는 것처럼 이 방을 조감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 방이 넓은 세상의 부속품 중 하나인 것처럼. 근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이 소리, 어 이거 무슨 소리지? 개수 근처에서 갑자기, 물이 차오른다!

물이
              넘쳐서

                                 이
                                             방을

                                                            가득
                                                                              채울

                                                                                                   거야

어쩌지 하면서도 아, 이 방이 세계의 하나라면,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공허라면 물이 넘쳐서 방을 가득 채우고, 어느 틈새로 흘러나가 건물을 돌고, 건물의 모든 빈 공간을 전부 채우고, 다시 증발하고 비가 되어서 다시 내리는 모습을 봤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전부 상상인데, 어쨌든 제습기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뚝 뚝 떨어지고, 이 물은 다시 어딘가로 흘러가고, 빗방울은 조금씩 내리고, 오늘은 조용한 비 오는 여름날이고. 그러니까 이런 건 이런 날에만 가능한 조 용한 상상인데, 나는 아직 침대에 누워서 하루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어.

 

 

Part 3.

비닐

방입니다.
작은 방. 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요, 일단은 방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에는 하루종일, 방 안에서 순환하는 공기를 타고
바스락

저 비닐은 방에 사는 사람이 어디서 받아온 것입니다. 무언가를 버리려고요. 애초에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버려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가끔 눈을 감고 있으면 방이 온통 비닐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요. 여기 저기 닿는 데마다 바스락 거리면서.

비닐은 아마 자신이 눈에 띄지만 않으면 버려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습지요. 이렇게 바스락거리는데 투명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그리고 자기의 꿈을 이야기해줬어요.
언젠가 창문이 열리는 날에 밖으로 날아가는 꿈이요. 풍선처럼 바람을 머금고 저 멀리 가는 꿈.

흥미롭게도 이 방에 사는 사람 역시 간밤에 그 꿈을 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미뤄뒀던 분리수거를 했다네요. 바스락 바스락
비닐 안에 비닐을 하나씩 모으면서 바스락 바스락.

 

 

Part 4.

세탁기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조금 바보 같이 들리겠지만 나 얼마 전에 네가 두고 간 옷들을 전부 태우려고 했었다?
불을 지를만한 공터도 알아두고 휘발유와 라이터도 미리 사두었어.
그리고 옷을 바싹 말리려고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옷들을 널어두었는데 아뿔싸 비가 오고 만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창문을 잘 닫지 않으니까, 옷들이 비에 다 젖었더라고. 그래서 이왕 젖은 김에, 집에서 덜 마른 빨래 냄새가 나는 건 싫으니까, 옷들을 전부 세탁기에 넣고 실내건조용 세제와 미국산 섬유유연제도 잔뜩 넣어서 옷들을 돌렸어. 그 좋은 향기 난다고 했던 거 있잖아, 아직 조금 남아있어서 계속 쓰고 있었거든.
드럼세탁기가 조금씩 돌아가고 단추와 지퍼 같은 것들이 세탁기 내부의 메탈과 부딪히면서 타닥 타닥 소리 같은 게 났어. 그리고 물이 차오르고 거품이 일고 그 다음부터는 작은 폭포 같은 게 바닥으로 추락하듯이 둔탁한 물소리가 계속 났지.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옷들이 돌아가면서 서로 꼬이는 걸 지켜보는데,
그걸 보고있자니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내가 원한 건 지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었으니까. 다 태워버리고 재만 남겨야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재들도 다 어딘가에 뿌려버리고 없애야만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리고 알고 보니까 아무데서나 뭔가를 태우는 건 불법이더라고.)
그래서 두고 간 옷들은 그냥 잘 세탁해서 내가 입기로 했어. 편지에는 셔츠 몇 개에 남아있던 여분의 단추들을 동봉해서 보내. 이제 달려있던 단추들이 떨어지면 다른 단추를 사다가 꿰매어 입어야겠지? 그래도 뒤돌아보니 잘못 꿴 시작 같은 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쨌든 이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으니까.
너도 나중에 한 번 드럼세탁기 앞에 쭈그려 앉아서 옷가지와 수건 같은 것들이 빙빙 돌아가는 걸 지켜봐. 그런 시간들이 가끔은 도움이 될 때가 있잖아. 알지?
그럼 언제나 건강하고, 예상치 못한 좋은 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면서.
안녕히!